2025-06-04
필자에게 ‘노노’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가진 한국인 친구가 있다. 흔히 ‘노’라고 하면 성격이 까칠하거나 사이좋게 지내기 어려운 사람을 떠올리기 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친구는 호탕하고 남을 잘 도와주는 성격이다. 이 별명이 붙은 이유는 바로 친구가 경상북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경북 사투리는 상대방에게 질문할 때 문장 끝에 ‘-노’라는 독특한 어미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질문 뒤에 으레 평서형 대답이 따라와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정해진 짝꿍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뭐 묵었노?”라고 물으면 자연스럽게 “라면 묵었지예”라는 대답이 뒤따르는 식이다.
오랫동안 한국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주로 서울에 머물렀던 탓에 지방 사투리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간혹 한국의 방언이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중국의 속담 ‘십 리만 가도 말이 달라진다(十里不同音)’는 표현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만큼 지역마다 언어적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흥미롭다.
예전에 필자가 부산을 여행할 때 ‘노’, ‘데이’ 같은 부산식 종결어미에 익숙지 않아 상대방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워 당황했었다. 공손한 건지, 친절한 건지, 혹시 화를 내는 건 아닌지 혼자 머릿속으로 온갖 추측을 했던 웃지 못할 경험이었다. 한번은 길을 가던 중, 부산 사람이 필자에게 “조심하이소, 비 온다데이~”라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그 ‘데이’라는 묘한 어감 때문에 나에게 무슨 암시를 던지는 건 아닐까 엉뚱한 상상까지 펼쳤다. 나중에 한국 친구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그분이 비를 조심하라고 친절히 알려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툭 던지는 듯, 어감상 무겁게 들리는 ‘데이’는 중국어에서는 가벼운 뉘앙스를 더하는 ‘~너(呢), ~라(啦)’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문장의 끝부분에 ‘데이’만 붙여도 부산 특유의 넉살 좋고 정겨운 느낌이 살아나는 걸 보면 역시 언어의 세계는 오묘하고 흥미로운 매력이 있다.
부산의 경상도 사투리가 그저 ‘갸우뚱’ 정도로 헷갈리는 수준이라면, 제주 사투리는 난이도가 최상으로 올라가며 정말이지 알아듣기 어렵다. 외국인인 필자에게 그야말로 외계어 수준이었다. 제주 토박이가 필자에게 “어데 감수광”이라고 물었을 때, 필자의 머릿속엔 오로지 ‘감·수·광’이라는 세 글자에 갇혀버렸다. 물론 필자도 글자 ‘감수’ 작업을 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감수에 미친 자’라는 뜻의 ‘감수광(監修狂)’이라 불릴 만큼 열정적인 감수자는 아닌데 말이다. 나중에야 비로소 그 말이 “어디 가십니까?”라는 뜻의 아주 공손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제주어에는 독특한 고유 어휘와 문법, 발음이 있어 한국의 다른 지역 사투리와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가령 제주어에는 중세 한국어의 특징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의 표준 문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성까지 더해져 제주만의 독특하고 신비로운 언어 세계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 각지에서 사투리를 구사할 줄 아는 젊은 세대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투리의 소멸은 단순히 언어의 간소화를 넘어 오랜 시간 축적돼 온 ‘문화적 유전자’의 소실을 의미한다. 사투리 단어가 사라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마치 해독하지 못한 지방 역사의 귀한 원고를 하나씩 불살라 버리는 것과 같다. 필자는 이 땅의 다채로운 언어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고유한 울림을 잃지 않고 세대를 걸쳐 아름다운 메아리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그 안에는 이제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품었으며, 이 땅에서 어떻게 어우러져 살아왔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마지막 단서’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글|쑹샤오첸(宋筱茜), 한국 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