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8
중국어에 ‘도략(韜略)’이라는 단어가 있다. 주로 한 사람이 계획이나 전략에 능하고 지혜가 많음을 뜻하며 군사 정치 분야에 많이 사용된다. 실제로 이 단어는 중국의 고대 병서인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에서 기원한 것으로 <육도>는 2만 자에 달할 정도로 그 내용과 범위가 방대해 백과전서의 성격을 띤다.
고대 중국에서 <육도>의 지위
<육도>는 중국 고대 주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할 때 도움을 준 강태공(본명은 상·尙, 혹은 망·望, 자는 자야·子牙)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태공육도(太公六韜)>,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고도 불린다. <육도> 전서는 강태공이 주문왕(周文王)·주무왕과의 대화 형식으로 서술돼 있다. 각각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 등 총 6권으로 구성된다. <문도>는 나라를 다스리고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논하고 <무도>는 강적을 정벌하고 천하를 쟁취하는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용도>는 군대 관리와 군사 작전 배치 및 종합적인 보장 방안을 상세히 기술하고 <호도>는 무기 장비 및 전법을 서술하고 있으며 <표도>는 다양한 전장에서의 전술 시행을 요약하고 <견도>는 전차, 기병, 보병 등 여러 병과의 협력에 대해 설명했다.
<육도>는 진한(秦漢) 시대에 광범위하게 전파됐고 진나라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육도>의 구절을 인용했다.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는 서한의 국가 장서 중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둥(山東)성 린이(臨沂)시 인췌(銀雀)산에서 발견된 서한 초기 무덤에서 2100여 자에 달하는 <육도> 잔존본이 출토됐다. 서한의 장량(張良, 자는 자방·子房), 동한 말기의 유비(劉備), 제갈량(諸葛亮), 손권(孫權) 등 정치가와 군사 전략가들은 <육도>를 매우 중요시해 후대 병서와 전적에서 자주 참고되고 인용됐다. 통치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당나라 <당률소의(唐律疏議)>에서는 민간인의 <육도> 소지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징역 2년에 처하는 엄벌을 규정했다. 이는 당시 <육도>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과 중요성을 지녔는지 짐작게 한다.
북송(北宋) 신종(神宗) 시기에 이르러 조정은 <육도>를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위요자(尉繚子)>, <삼략(三略)>, <이정문대(李靖問對)>와 더불어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편입시켰고 이로부터 중국 고대 무학 경전으로 추앙받으며 군사 교육의 필독서가 됐다. 또한 여러 판본의 <육도>가 이때부터 하나의 고정된 판본으로 정착돼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명(明)나라 때 유인(劉寅)이 주해한 <육도직해(六韜直解)>는 문체가 간결하고 요점이 잘 정리돼 있으며 설명이 상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도 잘 검증돼 있어 <육도>를 읽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판본이 됐다. 청(清)나라 건륭(乾隆) 연간에는 <육도>를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했다.
<육도>와 고대 한국의 군사 교육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고려 경종은 신라의 마지막 군주이자 자신의 장인인 김부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추증하고 그 조서에서 김부가 재능이 뛰어나고 <육도>와 <삼략>에 대한 조예가 있다고 칭찬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대신 배극렴 등은 태조에게 <육도>와 <삼략>을 잘 이해하고 용맹한 인재만이 장군이 될 수 있다고 건의했다. 태종 즉위 초 무과 시험이 시행됐는데 3년마다 한 번씩 치르도록 했고 <육도>를 주요 시험 내용으로 규정했다.
1426년, 전라도 수군처치사 박실은 세종에게 올린 감사 편지에서 자신의 군사 운용 능력은 강상의 <육도>에 비할 수 없지만, 서주 선왕 시대의 방숙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 문종은 세종 때 무장 최윤덕에 대해 만인과 대항할 정도로 용맹하고 <육도>의 오묘한 이치를 통달했다고 높이 평가하며 그를 세종과 함께 종묘에 배향될 공신으로 선정했다. 1467년, 세조는 공신 연회에서 남이 장군을 칭찬하며 “오직 경(卿)만이 <육도>를 완전히 통달해 그 기세가 만인의 무리를 제압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성종이 무관 김세적을 우승지로 발탁하면서 그에게 어떤 병서를 읽었냐고 묻자 김세적은 <육도>만 읽었다고 답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김세적은 학문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를 싫어하는 무장조차 <육도>만큼은 읽었다고 언급할 정도이니 당시 군사 교육에서 <육도>가 얼마나 널리 보급됐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군비(軍備)가 느슨해지면서 무관들의 <육도> 학습 효과도 떨어졌다. 1601년, 선조는 대신들에게 무관이 글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육도> 등 병법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과의 전투에서 불리한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했다. 대신들은 일본인들도 <손자병법>과 <육도> 등 병서를 일본어로 번역해 읽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고대 일본에서 군사 인재를 양성하던 아시카가 학교는 <육도>를 주요 교과서로 삼았다. 숙종 시대 병조는 무장을 시찰하던 중 어영청 초관 이수원이 <육도> 초권(初卷)에 대해 숙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벌을 내렸다. 1754년, 영조는 많은 무관이 <육도>를 모르자 매우 노여워하며 병서를 통달해야 무관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대 한국 시문 속의 <육도>
고려의 이색은 자신의 시에서 “바람 가득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에 성난 파도 일어나서(風滿江淮起怒濤) 그 소리 싸우는 듯 들레어라(濤聲若翻戰聲鏖) 경서를 읽던 장군들까지 군사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며(論兵已到詩書將) 문을 닫고 <육도>를 탐독하고 싶구나(甚欲關門讀六韜)”라고 묘사했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은 자신의 시에서, 강태공은 <육도>의 신기한 전략으로 주문왕과 주무왕을 보좌했고 천여 년 뒤에도 명성이 자자해 제왕들이 학습했다고 격찬했다. 조선 중기 김득신도 “장군은 위풍당당하고 조운(趙雲, 자는 자룡·子龍)처럼 용맹하며 삼도를 같이 통솔하고 <육도>의 병법을 능숙하게 운용하는구나(將軍軒勇氣 膽似子龍豪 節制兼三道 施爲運六韜) 병력 관리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고 병사 훈련의 고됨을 두려워하지 마시길(須思分閫重 莫憚練兵勞) 율리의 도연명(陶淵明)을 불쌍히 여겨 돕는 단공(檀道濟)의 은혜를 가장 감사하노라(最荷權公惠 偏憐栗里陶)”라고 자신의 시에서 강조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재는 학생 조홍중을 위한 묘지문에서, 조홍중은 어릴 적부터 큰 뜻을 품고 <육도>와 같은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당시 군비가 허술하고 세상에 훌륭한 무관이 없음을 한탄했다. 고종 시대 지규식은 친구의 집에 찾아가 <육도>를 필사하고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돌아올 정도로 <육도>를 좋아했다. 필사는 옛 문인이 책을 얻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였다. 한국 국립 중앙도서관에는 조선 시대 신평승이 <육도>를 필사한 <태공도초(太公韜抄)>가 보존돼 있다. 근대에 이르러 송기식의 <해창문집>에는 그의 친구 김상진이 <육도>를 통독해 최익현에게 거리낌 없이 직언하고 시정을 논했으며 군사의 나태함을 통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군사 외에 조선 시대에는 죽은 자의 묘지를 선택해 주는 지관들도 <육도>를 술서로 사용했고 이를 토대로 산지의 음양오행을 세밀하게 살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육도>는 현대인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수천 년에 걸쳐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의 심오한 흐름 속에서 빛나는 한 축을 담당해 온 귀중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