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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영극에 담긴 일상의 정취


2025-07-10      

피영극 예술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VCG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한단은 고사성어와 태극권 문화, 여와 전설로도 유명하지만 또 다른 두 가지 문화 아이콘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쇠가죽 위에서 펼쳐지는 빛과 그림자의 예술인 ‘기남(冀南, 허베이성 남부 일대) 피영극’, 다른 하나는 골목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한단의 별미 ‘뤼러우쥐안빙(驢肉卷餅, 당나귀고기 전병)’이다.


쇠가죽 위로 너울대는 천년의 빛그림자

장막 위로 따스하고 부드러운 주황빛 그림자가 유영하듯 움직인다. 그 위로 쇠가죽으로 만든 ‘제천대성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날아다니자 무대 아래는 아이들의 웃음꽃으로 만발한다. 하지만 무대 뒤편의 장잉펑(張迎風) 씨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손에 쥔 세 개의 대나무 막대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기남 피영극의 5대 전승자인 그는 마자이(馬寨) 피영극 극단을 이끌고 있다. 이날도 극단의 대표작인 <서유기(西遊記)>가 상연 중이었다.


매주 토요일 저녁, 한단시 페이샹(肥鄉)구 마자이촌의 소극장은 마치 명절처럼 북적인다.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장막 뒤의 ‘무림고수’들이 펼치는 최고의 기예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든다. 팔을 휘두르고, 점프하고, 발을 구르는 장 씨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지만, 막대 위의 그림자 인형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수행한다. 이러한 내공은 모두 혹독한 연습을 통해 얻어진 결과다. 해가 뜨기 전부터 목소리를 가다듬고, 밤늦도록 대나무 막대기를 든 채 기본 자세를 연습하며, 혹한의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도 쉼 없이 수련에 매진한 덕분이다.


기남 피영극단은 보통 7~8명의 다재다능한 고수들로 구성돼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저우첸(掫簽)’이라 불리는 장인이다. 그는 두세 개의 그림자 인형을 동시에 조종하며 무술 장면을 펼친다. 왼손에는 조자룡(趙子龍), 오른손에는 관운장(關雲長)을 조종하면서, 동시에 발은 북소리 박자에 맞춰 무대를 빙글빙글 도는 연기까지 해야 한다. 한겨울 노천 공연에서 다른 이들이 두꺼운 옷을 껴입고도 벌벌 떨 때, ‘저우첸’ 장인은 얇은 단벌 셔츠만 입고도 온몸에서 모락모락 열기가 난다. 물론 다른 단원들도 분주하다. 징을 치는 사람은 가끔 가녀린 목소리로 여성 캐릭터를 맡아 노래하기도 하고, 현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중간에 역할을 겸해서 유성추(流星錘, 중국 전통 무술에 사용되는 무기)를 휘두르는 등 모두가 ‘만능 재주꾼’들이다.


공연이 끝나자 아이들이 무대 뒤로 몰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했다. 장 씨는 그림자 인형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 물려받은 그림자 인형이란다. 50년도 넘었지. 우리한테는 이것이 ‘가장 어린’ 인형이야.” 아이들은 인형에 시선을 고정하고 넋을 잃고 쳐다봤다. 쇠가죽 위에 칠해진 물감은 방금 막 완성한 탕화(糖畫, 설탕 공예)처럼 윤나고 선명했다.

쇠가죽으로 만든 그림자 인형은 튼튼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선명한 색감은 태항산(太行山)의 홰나무 수액에 백일 이상 담가야 얻을 수 있는 결과로, 이 과정을 거친 가죽은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


 그림자 인형 제작자 궈하이양(郭海洋) 씨는 마자이촌의 수탉이 첫 울음을 울자마자 작업대 앞에 앉았다. 그는 등불을 비추며 새로 만든 인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쇠가죽은 은은한 호박빛 광채를 뿜어냈다. 그의 작업대 위에는 대대로 물려받은 어골도(魚骨刀)와 반쯤 조각된 쇠가죽이 흩어져 있었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그의 칼솜씨는 정확하고 날카로워, 몇 번의 손질 만에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의 옆모습 윤곽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림자 인형은 반드시 측면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것을 ‘반쪽 얼굴로 천하를 본다(半面窺乾坤)’라고 한다.” 궈 씨의 설명이다.

기남 피영극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 사진/VCG

진시황도 즐겼을 법한 아침식사

궈 씨를 따라 한단 시내로 돌아오니, 어느새 도시는 잠에서 깨어나 활기를 되찾았고 거리 곳곳이 고소한 아침식사 냄새로 가득했다. 아무 식당에 들어가 앉은 뒤 궈 씨가 강력 추천한 한단의 대표적인 별미 ‘뤼러우쥐안빙’을 주문했다.


식당 요리사이기도 하는 자오(趙) 사장은 밀가루 반죽을 치대며 말했다. “우리 집은 광서 연간(1875년~1908년) 때부터 이 솥을 써 왔다. 매일 물은 새로 붓지만 씨 육수만큼은 절대 바꾸지 않는다.” 정통 뤼러우쥐안빙은 태항산에서 최소 3년 이상 방목한 검은 당나귀만을 고집한다. 고기는 홰나무 장작불에 6시간 동안 은근하게 푹 삶아내고, 마지막으로 청석판(靑石板) 위에 올려 산초소금을 뿌린 뒤 문질러 양념이 배도록 한다. 자오 사장이 솥뚜껑을 여는 순간, 팔각(八角)과 초과(草果) 등 20여 가지 향신료가 어우러진 뜨거운 김이 확 피어오른다. 자오 사장은 뜨끈뜨끈한 당나귀 고기를 밀전병에 끼워 손님에게 건네며 말했다. “뜨거울 때 드셔야 제맛이죠. 식으면 맛이 떨어져요.” 손님들이 만족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자오 사장이 흡족한 듯 농담을 던진다. “어릴 적 이 거리에 살았던 진시황도 이 맛을 좋아했을 겁니다!” 그는 웃으며 골목 어귀의 비석을 가리켰다. 그 위에 흐릿하게 새겨진 ‘시황의 고향(始皇故里)’이라는 글자가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한단시 중심 남서부에 위치한 주가항(朱家巷)은 진시황 영정(嬴政)이 태어난 곳이다.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진나라 장양왕 이인(異人)은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아 한단에서 영정을 낳았다. 영정이 한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훗날 6국 통일이라는 그의 통치 이념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옛날 한단 사람들의 하루는 늘 뤼러우쥐안빙과 함께 시작됐다. 고기 육즙이 입안 가득 터지는 그 순간, 마치 그날 하루의 스위치가 켜지는 것 같았다. 과연 진시황도 한단에 머물던 시절 이 별미를 맛보았을까? 그 역시 이 맛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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