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6
고대 중국에는 4대 미남이 있었다. 송옥(宋玉), 반안(潘安), 위개(衛玠), 고장공(高長恭)으로 외모뿐 아니라 재능도 뛰어났으며 문학적 소양이 높거나 무예가 출중한 이도 있었다.
송옥: 문학의 빛나는 준재
송옥(기원전 약 322년~기원전 298년)은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공자로 준수한 외모로 유명했다. 그의 미모는 동쪽 이웃집에에 사는 여인이 3년 동안 그를 훔쳐보게 만들었으며, 이는 ‘송옥동장(宋玉東牆)’이라는 성어로 발전해 아름답고 다정한 여성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고려 시대 한림원의 최구는 모란을 읊은 시에서 ‘벽에 기대 송옥을 본다(倚墻窺宋玉)’라고 표현했다. 모란을 벽에 기대 송옥을 보는 미녀에 비유해 풍류적이고 운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소년 시절 초나라로 온 송옥은 굴원의 <초사(楚辭)>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부(賦, 시와 산문 중간에 해당하는 중국 고전 문학의 한 형식)를 잘 지어 현재까지 16편이 전해진다. 고려의 이색은 <사변(辭辨)>에서 ‘부’는 굴원의 <초사>에서 유래했고 송옥이 계승, 발전시켰다고 했다.
이 밖에 송옥의 <구변(九辯)>은 가을 풍경을 통해 인재가 때를 만나지 못함과 쓸쓸한 인생을 표현하며 중국 ‘비추(悲秋, 가을을 슬퍼함)’ 문학 전통을 확립했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조추시(早秋詩)’에서 ‘송옥비사(宋玉悲辭)’를 언급했다. 조선시대의 문인의 경우 정태화는 양파유고(陽坡遺稿), 이상형은 천묵유고(天默遺稿), 강백년은 설봉유고(雪峰遺稿) 등에서 <송옥비추>를 제목으로 시를 썼다.
반안: 미남 애처가의 귀감
반안(247년~300년)은 이름은 악(岳), 자는 안인(安仁)으로 서진(西晉)의 문학가다. 역사서는 그를 ‘미자의(美姿儀)’라고 평가한다. 이는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크고 자세가 반듯하며 기품이 남달랐음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 문학에서는 종종 ‘외모가 반안처럼 보인다’는 말로 잘생긴 남성을 표현했다. 반안이 소년 시절 낙양(洛陽)의 거리에서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여성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마차에 과일을 던졌고 반안이 외출해서 돌아오면 늘 마차에 과일이 가득해 ‘척과영차(擲果盈車)’라는 성어가 생겼다. 이는 여성이 잘생긴 남성을 열렬히 추앙하고 흠모한다는 뜻이다.
반안은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세상을 떠난 아내 양 씨를 기리기 위해 쓴 <도망시(悼亡詩)>가 특히 유명하다. 12세에 혼인한 반안은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재혼하지 않았다. 그의 한결같은 마음에 후세 사람들에게 칭송받았으며 반안의 아명인 ‘단랑(檀郎)’과 ‘단노(檀奴)’는 고대 여성이 남편이나 정인을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부를 때의 대명사가 됐다. 반안이 하양(河陽)현 현령이었을 때 관내에 복사나무를 심어 황폐한 산을 푸르게 가꾸는 동시에 복숭아 판매로 백성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겼다. 이로 인해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반안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아 근심으로 인해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였다.
고려 시대 이규보는 시에서 ‘반악삼도원(潘岳三桃苑)’이라고 하면서 운치 있는 주거 환경을 묘사했다. 이는 반안이 복사나무를 심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인로는 눈이 내리는 풍경을 묘사한 시에서 ‘교교기반빈(皎皎欺潘鬢)’이라고 했다. 즉 흰 눈이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게 마치 반안의 희끗희끗한 귀밑머리 같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김만중은 부인을 잃은 친구를 위로하는 시에서 ‘요지반안인 정유도망시(遙知潘安仁 定有悼亡詩)’라고 했다. 친구가 반안처럼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하고 추모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시성은 ‘하여진반악 도리와하양(何如晉潘岳 桃李臥河陽)’이라며 반안이 하양에 복사나무를 심어 지역을 아름답게 만들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준 공덕을 칭송했다.
위개: 옥 같은 미남
위개(286년~312년), 자는 숙보(叔寶)로 진(晉)나라의 현학자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출중해 <진서(晉書)>는 그를 ‘풍신수이(風神秀異)’,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미풍신(美風神)’이라고 평가했고 당시 사람들은 옥처럼 잘생겼다고 ‘옥인(玉人)’이라고도 불렀다. 위개는 명문가 출신으로 조부는 무장인 위관(衛瓘)이었다.
어린 시절 위개는 병약해 어머니가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들은 항상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서진의 명사 악광(樂廣)은 인품이 고결했고 딸을 기꺼이 위개에게 시집보냈다. 후세는 그들을 ‘장인은 얼음처럼 맑고 깨끗한 기상이 있고, 사위는 옥처럼 윤기 있는 품격이 있다(妻父有冰清之姿 婿有璧潤之望)’고 칭송해 ‘빙청옥윤(冰清玉润)’이라는 성어가 유래됐다. 이후 진나라 조정이 남쪽으로 이전하자 위개도 강남으로 이주해 건업(建鄴, 지금의 장쑤성 난징시)에 머물렀다. 그의 준수한 외모를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이미 지병으로 고생하던 위개는 병세가 더욱 악화돼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이재는 <장사랑박공묘표(將仕郞朴公墓表)>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 위개는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세상을 떠났는데, 오늘날 박공이 요절한 불행이 위개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경여는 친구를 추모하는 시에서 ‘위개의 잘생긴 풍모를 앞다퉈 말하다(爭稱衛玠好風神)’라고 했다. 즉 친구가 위개처럼 준수했으나 마찬가지로 위개처럼 요절했다는 것이다. 이원정은 장인을 애도하는 <제문(祭文)>에서 ‘위개처럼 옥같이 윤택하지 못함이 부끄럽다. 그러나 장인은 악광처럼 맑고 고결했다(慚非衛玠之玉潤. 叨陪樂廣之冰清).’고 했다.
1804년, 조선시대 순조는 위개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했다. 문신 박종훈은 ‘가인(可人)’ 즉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안정복은 <여정태서(與鄭台書)>에서 예나 지금이나 재능과 덕을 갖춘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껴 때론 이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며 위개의 이야기가 전적으로 허구는 아니라고 말했다.
고장공: 전투에 용맹했던 준수한 장수
고장공(541년~573년)은 본명이 고효관(高孝瓘)이고 또 다른 이름은 고숙(高肅), 자는 장공(長恭)이다. 북제 문양제 고징(高澄)의 넷째 아들로 봉호는 ‘난릉왕(蘭陵王)’이다. 고장공은 용모가 준수하고 압도적으로 아름다웠으나 이것은 도리어 전투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의 미모가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적을 위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투에 나갈 때 적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무서운 가면을 썼다.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기 때문에 북제의 장병들은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난릉왕입진악(蘭陵王入陣樂)>이라는 가무극을 만들었다. 가무극 출연자들도 가면을 써서 ‘대면무(大面舞)’라고도 한다.
고대 한국에는 난릉왕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최치원의 <향악잡영(鄉樂雜詠)>에는 신라의 대면무가 형식 면에서 <난릉왕입진악>과 비슷한 곳이 많다고 언급했다. 이 두 전통 가무극에 대해 역사적인 연관성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1876년 조선 수신사 김기수는 일본에서 <난릉왕입진악>을 감상한 바 있다. 이유원도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난릉왕이 가면을 쓰고 전투에 임했고 장병들이 ‘난릉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기록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고대 중국 4대 미남의 전설은 고대 한국인에게도 널리 회자됐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