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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 우의를 상징하는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샤쉐 당지부 서기 인터뷰


2025-08-13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 기념비


항일전쟁의 기억이 새겨진 도시, 충칭(重慶)은 중국 인민의 피맺힌 저항의 기억을 증명하는 곳이자 중한 양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에 맞서 싸운 공동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6년이라는 시간을 충칭에서 보냈다. 이 6년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활발했던 시기로 평가되며 동시에 충칭을 중한 관계사에서 유일무이한 역사의 이정표로 남겼다. 최근 본지는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이하 전시관) 샤쉐(夏雪) 당지부 서기를 만나 국경 넘어 손을 맞잡고 함께 투쟁했던 숭고한 역사의 기억을 들어봤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전경


충칭에서 마주한 역사의 기억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다.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기착지로서 두 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맞서 공동으로 항거했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샤 서기가 핵심을 찌르며 말문을 열었다.


1920년대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 안창호, 이동녕, 김구 선생은 난국 타개를 위해 필사적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1932년 1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를 도쿄 궁성 사쿠라다몬으로 보내 일왕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같은 해 4월, 다시 윤봉길 의사를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에 보내 폭탄 의거를 감행했다. 이로 인해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폭사하고 주중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이 중상을 입으며 세계만방에 충격을 안기는 데 성공했다. 일본군이 상하이 한국 교민들에게 무차별적 보복을 가할 것을 우려한 김구 선생은 5월 10일 현지 신문에 <훙커우공원 폭탄 안(案)의 진상>이라는 글을 게재해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밝히고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 이에 일본군은 즉시 상하이에서 광란의 보복을 자행했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며 프랑스 조계지 내의 독립운동 거점을 파괴하려 했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구성원들은 중국 국민정부와 민중들의 도움 받아 힘겹게 서쪽으로 피신길에 올랐다.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전장(鎮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등지를 돌다 마침내 충칭에 도착하며 8년에 걸친 유랑을 마무리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충칭 자링(嘉陵)빈관에서 성립 전례식을 갖고 공식 창설됐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침내 자체 무장력을 갖추게 됐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 제1지대가 광복군에 편입됐다. 이후 한국 광복군은 중국의 주요 전선으로 달려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는 한편 중국의 항일전쟁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보냈다.


“1944년에서 1945년 사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핵심 기구들은 충칭시 위중(渝中)구 롄화츠(蓮花池) 행관(行館) 집결해 업무를 처리했다. 양국 국민이 함께 공동의 적과 싸웠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샤 서기가 강조했다. 이곳은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유적을 최대한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청기와와 회색 벽돌이 보기 좋게 조화를 이루고, 중앙 돌계단을 따라 양쪽으로 두 줄의 건물이 위를 향해 뻗어 있다. 특히 (門楣, 문 위의 틀)에는 한국어, 번체(繁體) 중국어, 영어 3개 국어로 적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1층에 임시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의회) 회의실을 복원한 모습이다.


30년 간 지켜온 기억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양국 정부는 ‘롄화츠 38번지’를 양국 국민이 함께 항일 투쟁을 펼쳤던 사적(史蹟)으로 공식 인정했다. 1995년 8월에는 청사 옛 터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해 개방했다. 샤 서기는 개관 당시 초창기 직원 중 한 사람으로 이곳에서 꼬박 30년을 근무했다.


“나 역시 전시관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샤 서기가 깊은 감회에 잠겨 말했다. 1996년 초 해설사로 입사한 그는 이후 사업팀 부주임과 주임을 거쳐 부관장 자리까지 올랐고 현재 당지부 서기직에 이르렀다. 그의 직업 경력 역시 이 기념관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 “올해 말이면 이곳에서의 삶도 정확히 30년이 된다. ‘한 길을 선택해 일생을 바친다’라는 신념을 실천한 셈이다.”


현재 전시관에 소장된 약 1700점(세트)의 유물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와 근현대 중국, 나아가 근대 동아시아가 열강으로부터 당한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전시관에 있는 200권 가까운 방명록은 우리 전시관에 매우 소중한 자료다.” 샤 서기가 말했다. “여기에 적힌 글은 양국 국민의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방명록 중에는 ‘한중 양국 국민들이 독립운동의 영광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역사적인 공간을 정성껏 보존해 준 중국 정부와 충칭시 정부에 감사드린다’는 글귀처럼 청사를 잘 보존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있고, ‘옛 모습이 재현된 것을 보고 선조들의 희생이 떠올라 감사함과 북받치는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순간은 살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역사가 있기에 지금 내가 충칭에 올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한국 국민으로서 느낀 깊은 감동을 표현한 글도 있었다. 또 전시관의 수준 높은 관리를 칭찬하는 메시지도 적혀 있었다.


‘중한 청년 외교관 교류사업’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이 중국 외교부 관계자들과 함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을 방문했다.


역사 유적에서 민심의 다리로

올해는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이자 한국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시관은 최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관리처와 함께 한국 독립기념관의 지원을 받아 ‘세계 반파시즘 전쟁 중의 중한 여성의 빛’이라는 임시 사진전을 열었다. 샤 서기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공동 항일전쟁의 세월 속에서 빛났던 ‘여성의 빛’”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전은 항일전쟁 기간 목숨을 기꺼이 내던지며 적에게 용감하게 맞섰던 양국 여성들을 조명했다. 귀중한 사진과 생생한 사료를 통해 조일만, 성본화, 권기옥, 방순희 등 여성 영웅들이 민족 존망의 위기에서 발 벗고 나선 용감한 행적을 기록해 많은 반향을 얻었다. 샤 서기는 자신이 잊을 수 없는 한 한국 유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여학생은 상하이에서 전시를 관람한 후 우리 전시관을 알게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일부러 충칭까지 와 관람을 했다. 그리고 느낀 점을 말하던 도중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며 생각지도 못했던 점 세 가지를 들려줬다. 충칭에 이처럼 중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남아있는 줄 몰랐고, 청사가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는 줄 몰랐으며, 항일 전쟁이라는 힘든 세월 속에서 중국 민중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이처럼 큰 도움을 준 것은 더더욱 몰랐다고 말했다.”


샤 서기는 “전시를 준비하느라 고생했지만 그 학생의 진심이 담긴 감회를 보니 보람 있었다”라며 “특히 ‘조용히 스며드는 문화의 힘’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고, 이 전시관이 중한 관계의 ‘윤활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라고 덧붙였다.


전시관은 올해 여러 곳의 중국 문화재 보호기관과 손잡고 특별한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 각지에 퍼져 있는, 보존이 잘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운동 유적들을 고화질 영상과 체계적인 자료로 엮어 11월 한국에서 사진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처음에는 한국 협력기관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 이미 비슷한 종류의 기념전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꾸준한 소통을 통해 이 전시만이 지닌 특별한 가치를 조금씩 인식하게 됐다. 더 많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범위한 역사적 발자취를 알리고, 양국이 공유하는 문화 유적이 중국에서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말이다.” 샤 서기는 현재 한국 측의 태도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전시회 개최를 지원할 뿐 아니라 순회 전시 지역을 확대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양국이 함께 어깨를 맞대고 항일전쟁에 뛰어든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샤 서기는 통찰력 있고 현실적인 시선에서 이렇게 답했다. “동북아시아는 지정학적으로 민감하고 복잡하며 역사적으로도 깊이 얽혀 있다.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인 만큼 양국은 협력과 상생의 기반을 모색해야 한다. 함께 항일의 불꽃을 태웠던 그 시절은 중한 양국 사이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서와 의리의 토대다. 국가 관계의 부침을 넘어서 그 역동의 힘은 미래지향적인 발전과 협력에도 가장 굳건한 지렛대가 되어 줄 것이다.”


2019년 7월 9일, 한국 학생단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을 방문해 전시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한 마음으로 동행하는 양국 청년

 “최근 뜻깊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김구 선생의 주치의였던 광복군사령부 군의처장 유진동 선생의 아들 유수동 씨가 한국 학생단을 조직해 방문했다”라며 샤 서기가 이들의 소감을 전했다. “학생들은 ‘중국이 이렇게 크고 충칭이 이렇게 선진화된 도시인 줄 몰랐다. 중한 간에 이처럼 깊은 역사적 교집합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경험을 빗대어 이야기하며 문화적 연결고리와 청년 교류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는 민심을 잇는 중요한 교량이다. 양국은 전통 예술과 역사의 기억 등 심층적인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고 단순한 흐름이 젊은 세대의 상호 인식을 주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청년은 나라의 미래다. 두 나라 젊은 세대 간의 이해와 소통, 정서적 공감대를 찾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열심히 개척해야 할 방향이다”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샤 서기는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잘된 점을 배우고 동시에 서서히 스며드는 방식으로 문화와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 양국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싸웠던 공동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국민감정 개선과 소통 확대를 돕는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일시적 갈등을 딛고 보다 미래지향적인 평화적 이념을 함께 키워나가고 대대로 계승해야 한다. 이것을 중한 관계가 더 안정적이고 멀리 나아가게 하는 견고한 토대이자 폭넓은 공감대로 삼아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푸자오난(付兆楠)

사진|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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