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6
후이족 전조와 한(漢)족의 목각, 짱족의 채색화가 어우러진 팔방십삼항 거리 풍경
간쑤성 린샤시 팔방십삼항(八坊十三巷)은 실크로드 연선과 황허 유역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했다. 이곳의 골목 구조는 강남(江南) 수향의 우아한 분위기와는 달리, 청색 벽돌과 짙은 회색 기와 건축물이 즐비해 천년에 걸친 민족 융합의 역사적 흔적을 담고 있다. 옛 골목으로 들어서면 얼룩덜룩한 석판길과 크고 작은 골목에 있는 벽돌 조각, 회랑 등 건축 요소가 여러 민족이 공생하는 역사의 맥락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실크로드 위의 고대 시장
역사의 중후함이 물씬 풍기는 석굴을 떠나 린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한 생동감 넘치는 교방 골목으로 돌아오면 주변의 공기가 떠들썩하고 활기차게 바뀐다.
‘방(坊)’은 고대 도시의 기층 거주 단위로 지금의 커뮤니티와 비슷하다. 린샤에는 후이족 사람들이 대대로 생활한 구시가지가 있다. 당나라 때부터 대식국(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과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과 승려가 왕래하면서 이곳에서 무역, 포교, 거주를 했다. 8개의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대사방(大寺坊), 기사방(祁寺坊) 등 8개 교방과 대가항(大旮巷), 소남항(小南巷) 등 13개의 전통 골목이 형성됐고 사람들은 이를 ‘팔방십삼항’이라고 불렀다.
정오가 되자 햇빛이 청벽돌과 회색 기와의 건축물을 가로질러 대가항의 916개 청벽돌로 이어 붙여 만든 초대형 ‘입체 지도’ 위로 쏟아진다. 팔방십삼항 전경이 벽돌 위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여덟 개의 큰 방과 시장이 한눈에 들어오고, 13개 골목이 종횡으로 교차하며 사방으로 뻗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양파 모양의 돔 지붕이 설치된 사원을 중심으로 성냥갑처럼 정렬된 작은 사합원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이 골목에서는 벽을 도화지로 칼을 붓으로 삼은 전조(磚雕, 청벽돌에 산수나 꽃·인물 등의 문양을 조각하는 것) 예술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느 모퉁이 벽에는 고대 차마고도 호시(互市)의 활기찬 풍경이 새겨져 있다. 실크로드 상의 중요한 도시인 린샤는 예부터 상인이 운집했다. 구름무늬가 감긴 액자 안에는 낙타를 끄는 상단 행렬, 말에게 먹이를 주는 시종들, 좌판을 벌이는 노점상, 찻집에서 쉬고 있는 손님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조각돼 있다. 화면 중앙에는 챙 넓은 모자를 쓴 현지 상인과 하얀 작은 모자를 쓴 아랍 상인이 악수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사실 이 장면은 소매에 손을 숨기고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상품 가격을 소매에 숨겨 흥정하는 방식을 ‘수리탄금(袖里吞金)’이라고 한다.
린샤의 전조는 북송 때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명청(明淸) 시대에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이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조 작품은 장인이 벽돌을 한 장 한 장 이어 붙이고 칼질을 반복하며 정성스럽게 다듬어 만든 것이다.
청벽돌 위에 핀 ‘꽃’
린샤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한다. 예부터 모란은 부귀와 상서로움을 상징해 현지의 전조 예술가들은 청벽돌에 모란을 조각해 기둥과 대들보에 장식했다. 린샤 전조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자인 선잔웨이(沈佔偉) 장인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인물이다.
‘땅땅’ 조각칼이 벽돌 위를 가볍게 두드리자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소리가 강철을 두드리는 것처럼 맑게 울려야 좋은 벽돌이다.” 선 장인은 공방에서 벽돌 선별부터 다듬는 작업, 연필로 본뜨기, 정교하게 조각하며 설치하고 배치하는 것까지, 전조의 각 단계를 세심하게 시연했다. 그의 손길이 지나면 청벽돌이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나뭇가지가 돼 뻗어 나와 꽃을 피우고 벽감(壁龕)에 채워져 사탑에 놓이게 된다. 건축물에 새겨진 전조는 오랜 침묵 속에 창작자의 피땀 어린 노력과 기지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린샤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선 장인은 어릴 때부터 전조 예술에 매료됐다. “어릴 때 전조, 연화(年畫), 목각 등 관찰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따라 해보곤 했다. 하지만 그때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나뭇가지나 깨진 벽돌, 기와 조각으로 땅바닥이나 벽에 자주 쓰고 그리며 연습했다.”
1990년. 22세의 선 장인은 경험이 풍부한 예술가의 지도로 전조 예술의 길에 들어섰다. 탁월한 회화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길거리 작은 매대에서 시작해 불과 2년 만에 자신의 공방을 차렸고 이를 통해 현지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때 마침 린샤 유파파사(榆巴巴寺) 재건이 시작됐고 이곳에 전조로 된 ‘박고가(博古架, 골동품 진열대)’ 두 점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공정이 복잡하고 난도가 높아 업계 고수들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시 젊었던 선 장인이 이 작업의 의뢰를 수락한 뒤 혼신의 힘을 다해 험난한 작업에 매달렸다. 8개월간의 집중적인 노력 끝에, 수십 개의 청벽돌이 그의 손을 거쳐 화려한 꽃무늬와 다양한 분재, 기물, 동물 조형으로 장식된 아름답고 정교한 박고가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 기념비적 도전을 통해 그는 업계에서 폭넓게 인정받는 전조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 대가항 길목에 있는 아름다운 팔방심삼항 전경 전조 그림은 심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57세인 그는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했고 자신의 아들도 전조의 세계로 이끌었다. 거리 곳곳에 있는 전조 벽 앞에서 그가 제자들에게 수업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깨진 도자기 간의 문명 퍼즐
팔방십삼항에 가면 유독 시선을 끄는 특별한 벽돌담이 있다. 거대한 도자기 항아리 부조가 ‘배를 내밀며’ 튀어나와 있는 이색적 모습은 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절로 멈추게 한다.
이 항아리 부조의 원형은 1950년 린샤 지스산 바오안(保安)족, 둥샹(東鄉)족, 싸라(撒拉)족 자치현에서 출토된 ‘채도왕’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 마가요(馬家窯)문화는 린샤의 대지에 수많은 보물을 남겼고 이로써 린샤는 ‘채도의 고장’이라고 불렸다.
팔방십삼항에서 멀지 않은 차마고시(茶馬古市) 문화 거리에 있는 채도 장인 마헤이마이(馬黑麥)의 작업대에는 5천 년 전 ‘보물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이 후이족 장인이 붓으로 파편 표면을 살살 털어내자 청동색 소용돌이 문양이 햇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마치 황허의 물결이 토기 속에 봉인돼 있는 것 같았다.
“갈라진 틈 하나를 붙이는데 대략 한 달 정도 걸린다.” 마 장인은 깨진 도자기 항아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는 항아리의 전생과 현세를 상상하면서 극도의 인내심으로 최초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54세인 마 장인은 어릴 적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계단식 논을 파다 나온 것이라며 채도 항아리를 가져왔다. 그는 항아리 몸체에 있던 복잡한 무늬와 소박한 만듦새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가 살던 궁장(工匠, 공예 장인)촌 강가에는 버려진 옛 흙 가마가 있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근처 흙에서 파낸 채도 파편을 깨진 기와라고 생각하고 삽으로 부숴버렸다. 그러나 마 장인의 눈에는 강렬한 햇빛을 받은 채도 파편이 황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열일곱 살 때 궁장촌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런데 내가 본 것 중 가장 눈부신 건 바로 채도 파편의 빛깔이었다.” 마 장인은 그것에 단단히 매료돼 예쁜 조각들을 주워 집으로 돌아와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 봤다. 이것이 그가 채도 복원 사업에 종사하게 된 계기였다.
어른이 된 마 장인은 린샤에 채도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 여기에는 고대풍의 채도 공예품 제작도 겸했다. 채도가 가득 놓여 있어 딱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만 남은 공방에서 그는 날마다 채도를 복원하고 만든다. 흙을 고르고 반죽하고 성형하고 문양을 새기는 과정을 수십 년간 한결같이 반복하며, 마 장인은 부서진 도자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투박한 누런 흙에 잃었던 광채를 되찾아줬다.
최근 마 장인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말레이시아 등 ‘일대일로(一帶一路)’ 공동 건설 국가에서 개최된 국제 문화 교류 전시회에 참여해 린샤의 채도 문화를 새로운 세상에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