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6
병령사 석굴은 ‘실크로드 위의 첫 번째 황허 석굴’로 불리며 불교가 서역에서 중원으로 유입된 역사 과정을 보여준다.
황허 상류 지스산(積石山) 일대의 암석은 독특한 지형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천년 동안 이어진 기억을 담고 있다. 대우(大禹)가 산을 쪼개 물을 다스렸다는 전설에서 서진(西秦)의 승려가 절벽에 동굴을 파 불상과 벽화를 조각한 역사까지, 이 협곡은 인간과 자연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룬 상호작용의 산증인이다. 협곡에는 물줄기가 모여 흐르고 석림이 우뚝 솟아 있으며 절벽 사이에 새겨진 불상과 명문은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신앙과 예술 그리고 시대의 흔적을 조용히 전하고 있다.
암석 사이에 서린 전설
새벽 햇살이 희미하게 번지자 린샤 서쪽의 지스산이 옅은 안개에 휩싸였다. 산속 협곡에서는 황톳빛 타오허와 에메랄드빛 황허가 마치 두 줄기의 비단처럼 뒤얽히며 흐른다. 드론 시점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천지(天地)가 빚어낸 ‘음양 태극도(陰陽太極圖)’ 같다. 가이드는 강가의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가리키며 “전설에 따르면 이 협곡은 대우가 물을 다스릴 때 도끼로 갈라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는 현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이다.
상고시대에는 웅장하게 솟아오른 지스산이 황허의 세찬 물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기 때마다 강물이 범람해 백성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대우와 백성들은 돌도끼, 돌칼, 돌삽 등 간소한 도구를 들고 날마다 지스산에서 사투를 벌이며 작업했다. 마침내 성공적으로 틈을 뚫어 황허 물길을 돌려놓았고 지역의 물난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상서·우공(尚書·禹貢)>에는 대우가 ‘황허를 지스산에서부터 용문까지 이끌었다(導河積石 至於龍門)’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지스산을 대우 치수의 발원지라고 생각했다. 황허 남쪽 기슭에는 높이 약 3m, 직경 10여 m의 거대한 암석이 있는데 ‘우왕석(禹王石)’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대우가 쉬었던 곳으로 그 앞쪽에는 ‘대우가 교룡을 베었다(大禹斬蛟崖)’는 전설의 장소도 있다.” 황허변에서 20년 동안 일해온 후이족 남성 가이드가 각 바위층의 주름 사이사이에 얽힌 전설을 능숙하게 설명해 줬다.
새벽안개가 막 걷히기 시작할 무렵, 배를 타고 류자샤(劉家峽) 댐을 지나면 강물이 갑자기 푸른 옥 빛의 띠처럼 하나로 모인다. 양쪽 기슭에 적갈색 산체는 마치 거대한 도끼로 쪼갠 것처럼 암석층이 겹겹이 드러나 수많은 책이 하늘과 땅 사이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것 같다. 물살을 십여 리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면 갑자기 금홍빛 햇살이 수면 위로 쏟아진다. 태양이 어느새 산 정상에 도달해 석림 전체가 마치 용암처럼 붉게 물들었다.
이곳은 병령석림(炳靈石林)으로 백악기의 자홍색 세립 사암이 퇴적돼 이루어진 단샤의 경관이다. 배의 속도가 느려지자 안개에 가려진 석림이 서서히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녹슨 듯한 붉은색 암석이 아침 햇살에 금속 같은 광택을 내뿜고 회백색 암석층은 석고 같은 차가운 느낌을 준다. “이곳의 사암은 경도가 청동과 비슷해 장인이 세세한 부분을 쉽게 조각할 수 있고 비교적 부드러운 황토에 비해 풍화에 더 강해서 석굴을 파기에 적합하다.” 가이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는 좁은 협곡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거대한 불상이 엄숙하게 정좌한 채 무심한 표정으로 강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병령석림의 단샤 지형과 맑고 고요한 병령호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이룬다.
절벽 위의 ‘불교 박물관’
배가 기슭에 닿자 황금빛 햇살이 절벽을 가득 채웠다. 수직으로 깎아지를 듯한 산세가 굽이 치는 황허 옆에 천혜의 피난처를 만들었다. 약 1600년 전 16국 시대 서진(西秦)의 승려들은 이곳의 독특한 지형이 마음에 들어 절벽에 불교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후 10여 개 왕조의 후손들이 석굴을 조성하거나 개축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병령사(炳靈寺) 석굴이 형성됐다.
‘병령’은 짱(藏)어를 음역한 것으로 ‘심만불(十萬佛)’이라는 뜻이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깎아지를 듯한 절벽과 벼랑에는 크고 작은 동굴과 불감(佛龕, 불상을 모시기 위해 벽면에 만들어진 작은 공간) 200여 개가 있고 내부에 조각상 800여 개와 1000㎡에 달하는 벽화가 보존돼 있다. 이는 산세를 따라 삼삼오오 만들어져 있고 높낮이가 서로 다르게 위치해 있으며 잔도(棧道)로 연결돼 있다. 20세기 중반 수위 상승으로 인한 피해로부터 석굴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 앞에 20미터에 달하는 제방을 쌓았다.
드높은 제방을 따라 당(唐)나라 거대 불상 발아래를 지나, 절벽과 같은 색 잔도에 오르면 마치 시간의 터널에 들어선 것 같다. 길을 따라 숫자가 표시된 수많은 동굴과 석감(石龕)이 마치 진열장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그 안에는 시대별로 스타일이 다른 불상이 전시돼 있어 당시의 예술과 신앙심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진의 민첩하고 웅건함, 북위(北魏)의 빼어난 골격과 아름다운 형상, 북주(北周)의 둥글고 윤기나는 조각, 수(隋)당의 풍만함과 과장된 표현, 송(宋)나라의 개성적이고 사실적인 느낌까지 시공을 뛰어넘은 ‘소장품’들이 각 시대의 기억을 머금고 이 절벽 위에서 ‘불교 박물관’을 구성한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169굴에 도착하자 동굴 입구에서부터 시원한 기운이 밀려왔다. 동굴 안에 있는 여러 개의 불감이 있는데 대부분 서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굳세고 힘찬 외형에 선이 유려하다. 불감 주변에 그려진 벽화는 우아하고 그림 속 인물의 옷자락에 칠해진 청색과 남색 안료가 지금까지 퇴색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동굴 북쪽 부분에 먹으로 쓴 제기(題記) 한 점이 있는데, 낙관 부분에 ‘건홍원년(建弘元年)’이라는 글귀가 작품의 제작 시기를 명확히 알려준다. 이는 현재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석굴 제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이드는 불교를 믿었던 서진의 군주가 태자 책봉을 경축하기 위해 420년에 ‘건홍(建弘)’으로 연호를 바꿨다고 설명했다. 이 중대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서진의 고승대덕들은 당시 ‘황가 사원’이었던 당술굴(唐述窟, 병령사)을 대대적으로 중건하고 이 ‘건홍 제기’를 남겼다. 약 500자에 달하는 이 제기는 천년이 넘는 세월을 기적처럼 견뎌내고 남아 오늘날 중국 불상의 발전과 전파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고문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