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1
강인함과 책임감은 중화문명이 5천 년에 걸쳐 계속해서 이어져올 수 있었던 핵심 비결이다. ‘대우치수(大禹治水, 우임금이 물을 다스리다)’ 이야기에서부터 전란과 역경 속 끊임없이 맞서 싸웠던 근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와 용감하게 책임을 다하는 품격은 중화문명이 수많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게 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직면했을 때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라는 책임감으로 앞장서 난국을 타개하며 문명의 불씨를 이어나갔다. 오늘은 인류가 자연에 맞서 싸우고 운명을 바꾼 신화 이야기 ‘우공이산(愚公移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성어의 유래
‘우공이산’은 전국(戰國)시대 도가학파의 고전 <열자·탕문(列子·湯問)>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이다. 글자 그대로 우공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산을 옮기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배경에는 꾸준히 노력하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담겨 있으며 이는 천고에 전해지는 문화적 상징이 됐다.
오래전, 기주(冀州)의 남쪽, 하양(河陽)의 북쪽 지역에는 태항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이라는 거대한 두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산들은 면적이 700리(약 12만2500km²)에 달하고 높이가 만 길이나 돼 우공 일가가 다니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당시 우공의 나이는 아흔 살 가까이 됐는데, 가족들이 외출할 때마다 산을 멀리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 날 그는 가족들에게 “이 두 산이 너무 방해가 되니 우리 힘을 합쳐 저 산을 깎아 평평하게 길을 내면 어떠한가?”라고 말했다. 가족들은 모두 찬성했지만 아내는 약간 걱정이 돼 “우리 힘으로 조그만 언덕도 움직일 수 없는데, 이 큰 산들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파낸 흙과 돌은 어디로 옮기겠다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모두가 의논한 끝에 “발해(渤海) 연안으로 운반하자”라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우공은 아들과 손자들을 이끌고 날마다 돌을 깨고 흙을 파내어 광주리에 담아 발해까지 운반했다. 어떤 이는 비웃으며 “자네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구려! 나이가 몇인데 큰 산을 평평하게 만들겠다는 것인가? 망상에 불과한 헛된 짓이네!”라고 말했다. 우공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죽어도 아들이,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대대손손 이어서 산을 깎을 것이네. 하지만 이 산은 더 이상 높아질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한 길이 나겠지!” 그 사람은 우공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천제(天帝)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우공의 성실함과 끈기에 감동한 그는 두 명의 신선을 보내 태항산과 왕옥산을 옮기게 했다. 그리하여 북산 일대는 더 이상 거대한 산에 가로막히지 않게 됐고, 후세 사람들은 꾸준히 노력하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칭송할 때 ‘우공이산’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다.
현대판 ‘우공이산’, 훙치취 정신
역사적 긴 흐름 속에서 ‘우공이산’과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정위전해(精衛填海, 정위가 바다를 메운 이야기)’, 용감무쌍하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과부축일(夸父逐日, 태양을 좇다가 목이 말라죽은 과부 이야기), 자신을 희생하며 불법(佛法)을 구한 현장(玄奘)의 서역행 등이 그러하다. 이들의 어려움에 맞서는 불굴의 의지, 목표에 대한 극도의 집념, 개인을 초월한 책임감을 통해 중화민족이 절망적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는 정신적 불씨가 되었고 민족의 정신적 혈맥 속에 스며들었다. 오늘날에도 ‘산을 옮기는’ 현대판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훙치취(紅旗渠, 홍기거)다.
1960년대, 허난(河南) 린(林)현은 거의 매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당시 현위원회 서기였던 양구이(楊貴)는 군중을 이끌고 다음과 같은 맹세를 했다. “우공이 산을 옮길 수 있었듯이, 우리도 반드시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올릴 것이다!” 이 외침은 마치 우공이 가족들을 불러 모으던 호소처럼 현대판 ‘산 옮기기’의 서막을 열었다. 그들은 기계가 없으면 맨손으로 흙을 파고 돌을 쪼았으며 화약이 부족하면 재래식으로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제조했다. 절벽에 접근할 길이 없으면 밧줄을 허리에 묶고 공중에 매달려 작업을 이어갔다. ‘망치 하나, 정 하나 그리고 두 손’ 이것이 바로 30만 린현 주민들의 일상이었다. 작업 중 추락하거나 극심한 추위로 몸이 마비되기도 했지만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우공이 주변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듯이 그들은 슬픔을 땅에 묻고 계속해서 망치질을 이어갔다. 10년 동안 주민들은 스스로 도구와 식량을 준비해 태항산 깊은 곳에서 1000여 개에 달하는 산봉우리를 파서 평지로 만들고, 수로교를 설치해 터널을 뚫어 마침내 줘장허(濁漳河)의 물을 린현으로 끌어오는 대업을 이뤄냈다.
훙치취는 완공 후, 린현의 심각한 물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수많은 메마른 땅이 비옥한 농경지로 변모시켰다. 이와 동시에 수리 시설의 개선은 지역의 공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이끌어 경제에 탄탄한 기반을 다졌고 주민들의 생활 수준도 대폭 향상됐다. ‘자력갱생(自力更生), 간고창업(艱苦創業,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일을 극복하고 새롭게 일궈내는 힘), 단결협력(團結協作), 무사헌신(無私奉獻, 이타적 헌신)’의 훙치취 정신은 중화민족의 굳건한 의지와 자강불식(自強不息, 스스로 강해지려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아니함)을 보여주고 있다.
훙치취 정신은 바로 현대에 살아 숨 쉬는 우공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화민족의 뼛속 깊이 새겨진 강인한 의지를 대변하며 결코 헛된 호언장담이 아닌 확실하고 굳건한 실천의 증거다. 한 번의 망치질에 이어 또 한 번의 망치질을 거듭하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굳건히 이어가며 멈추지 않는 전진을 보여준다.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조급한 성과주의와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풍조 앞에서 ‘우공이산’과 훙치취 이야기는 마치 우리를 비추는 준엄한 거울과도 같다. 부조(浮躁)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신념의 가치와 물러서고 싶은 순간 발휘되는 용기를 비춰준다. 그리고 현실을 착실히 살고(腳踏實地) 협력하며 책임지는(協同擔當) 정신이 새로운 시대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칭산(靑山)
사진 | 인공지능(AI)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