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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한인 항일 자취와 이야기


2025-09-03      



2025년 9월 3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대회가 개최된다. 현대화된 역사의 고도는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하지만 베이징에 근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 인민은 망명한 한인(韓人) 지사(志士)들에게 투쟁의 무대를 제공했고 함께 반파시스트의 장엄한 서사를 써 내려갔다.


아픔의 역사와 베이징의 만남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반도(한반도)를 강제 병합한 뒤, 수많은 한인 애국지사들은 잇따라 힘겨운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초기, 베이징은 북양(北洋) 정부 소재지로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의 중요한 거점지였다. 1915년 박은식(朴殷植) 등은 오늘날의 베이징시 시청(西城)구 쉬안우먼네이다제(宣武門內大街)에 신한혁명당 본부를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베이징 지역 한국 독립운동사의 첫 장을 장식한 독립 운동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지만 일제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으로 많은 한인들이 중국으로 망명했다. 3·1운동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의 일부 한인들이 오늘날의 베이징 시청구 타이핑차오다제(太平橋大街)에서부터 얼룽루시제(二龍路西街)까지의 일대에서 신대한동맹회를 조직해 베이징에 있는 한인들의 집회를 열고 항일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했다. 같은 해 6월, 임기반(林基磐), 김사익(金思益), 이기호(李祈鎬) 등은 오늘날의 베이징시 시청구 주구러우다제(舊鼓樓大街) 소석교(小石橋) 후퉁(衚衕)을 근거지로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해 활동을 전개하고 조선반도 내부와 연락을 이어갔으며 각지에 지부를 설립했다.


1921년 4월 24일, 이회영(李會榮), 신채호(申采浩), 박용만(朴容萬) 등은 베이징 시즈먼(西直門) 삼패자(三牌子) 화원 창관루(暢觀樓)(현 베이징 동물원 소재)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해 독립 전쟁을 최우선으로 추진했다.


1931년 9·18 사변 이후 일본군이 중국 동북 지역을 점령하자 중국은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 한인 지사들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는 것을 적극 도왔다. 베이징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인들의 중요한 집결지이자 경유지가 됐다. 한국 독립군은 오늘날 베이징 시청구 궁먼커우(宮門口) 5조 20호 일대에 차례로 배치된 뒤 뤄양(洛陽), 난징(南京) 등 지역으로 이동했다.


한인 항일지사의 베이징 생활과 투쟁

신채호는 1918년 오늘날 베이징의 충원먼(崇文門) 둥다제(東大街) 둥볜먼차오(東便門橋) 부근에 거주했다. 당시 기차역에서 가까워 교통이 편리했다. 그는 <중화보(中華報)>와 <베이징일보>에 사설을 기고하며 한국이 중국과 항일 공동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징에서 그는 혁명 동지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반려자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바로 3·1운동에 참여하고 옌징대학(燕京大學)에서 공부한 한국인 여성 박자혜(朴慈惠)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오늘날의 베이징시 시청구 진스팡제(錦什坊街) 일대에서 거주하며 독립운동가 부부로서 함께 반파시스트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구한말 시기의 관리 김달하(金達河)는 통리아문(通理衙門, 외교 담당 관청) 출신으로 1893년 베이징으로 파견돼 위안스카이(袁世凱), 돤치루이(段祺瑞)등 북양군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베이징에 있는 한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그는 조선총독부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의 이익을 배반했다. 1925년 3월 30일, 의열단의 이인홍(李仁洪)과 이기환(李箕煥) 등 애국 청년들은 오늘날의 베이징시 동성구(東城區) 차련점(車輦店) 후퉁 21호 일대에서 그를 처단해 항일 진영의 첩자를 제거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으로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1920년대 중반 그는 베이징의 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 진보사상을 접했고 귀국한 뒤 여러 차례 반일 활동에 참여해 투옥됐다. 1932년 10월부터 1933년 4월까지 이육사는 난징 교외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 후에 계속해서 독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애국 시가 등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1943년, 이육사는 조선반도로 돌아가 체포돼 투옥됐고 이후 베이징 일본헌병대 형무소로 이감돼 1944년 1월 옥중 순국했다.


군자통일주비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박용만은 1920년부터 베이징에서 생활했다. 1921년 9월 중국인과 결혼한 뒤, 부인의 가족이 정부 관료라는 배경을 이용해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와 김달하의 도움을 받았다는 혐의와 중국 군벌 우페이푸(吴佩孚)를 공개적으로 찬양한 이유로 중한 혁명 인사들에게 반역자로 여겨졌다. 결국 1928년 충원먼 밖에서 한인 애국지사에 의해 암살당했다. 격동의 시절, 베이징이라는 고도는 한인 혁명 투쟁의 각축장이었다.


중국 반파시스트 혁명을 위해 헌신한 한인 항일지사

베이징에 있던 적지 않은 한인들이 중국 인민 항일 전쟁에 참여했다. 김산(金山, 1905~1938)의 본명은 장지학(張志鶴)으로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1921년에 베이징의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에서 공부하던 때에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고 베이징에서 고려 공산당을 조직한 뒤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그는 공산당 지하당(地下黨) 북평시당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다. 아내 조아평(趙亞平)을 만나고 함께 반일 구국 운동에 나섰다. 1933년, 반역자의 밀고로 인해 체포된 후에도 두 사람은 감옥에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김산은 한때 조선반도로 인도됐지만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몰래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혁명 운동을 계속했다. 1934년, 김산과 조아평은 베이징에서 정식 결혼했다.


베이징 퉁저우(通州)의 루허(潞河) 중학교 (현 베이징시 퉁저우구 신화난루·新華南路 135호 소재)에서는 1920년대에 많은 한인 학생을 받았다. 주문빈(周文彬, 1908~1944)은 그중 대표적으로 걸출한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김성호(金成鎬)로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으며, 7살에 아버지와 함께 베이징 퉁저우 푸싱좡(復興莊)으로 피난 왔다. 1916년에 루허초등학교, 1922년에 루허중학교를 다녔고 1926년 둘째 형 김영호(金永鎬)의 소개로 주문빈은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일본군이 전면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한 뒤, 주문빈은 기동(冀東) 항일에 참여해 주도하였고, 이후 공산당 기동 지방 위원회의 서기와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 주임을 맡아 항일 유격전을 펼치고 기동 항일 근거지를 설립했다. 1944년, 승리의 여명이 밝아오기 전 불행히도 총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됐다.


역사의 자취는 찾기 어려울 수 있고, 역사의 이야기는 짧고 분명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불후의 반파시스트 정신은 영원히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기념행사는 이 땅 위에서 필사적으로 투쟁했던 한인 지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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