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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과 중한 역사 문화 교류


2025-06-23      



야생 공작은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에서 비교적 보기 드문 조류로 주로 중국 남서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공작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부귀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새로 여겨졌다.


공작과 중화 문화

서한(西漢) 시대, 한 문제(文帝)와 무제(武帝)는 남서 지역에서 진상한 공작을 받았다.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때 지금의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지역에 공작이 많이 서식했고 심지어 현지인은 공작을 기르기도 했다. 공작은 조공과 교역을 통해 중원 지역으로 들어왔다.


공작의 화려한 깃털과 당당한 자태는 고대 중국인들을 감탄케 했으며 특히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삼국 시대의 양수(楊修)는 조조(曹操)의 집에서 공작을 보고 신기해하며 조식(曹植)의 명령으로 <공작부(孔雀賦)>를 지었다. 동오(東吳)의 관료는 남쪽 지역에서 공작 수천 마리를 강남의 귀족에게 바쳤다. 진 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 시기 서역인이 진상한 공작은 인간의 지시를 알아듣고 다양한 춤 동작을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동한 말기의 악부시(樂府詩)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함께 목숨을 바친 부부를 찬양했으며 이로써 공작은 충절이라는 문화적 함의를 갖게 됐다. 그러나 당시 대중에게 공작은 여전히 낯설고 신비한 생물체였다.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일반 백성들도 공작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방천리(房千里)의 <남방이물지(南方異物志)>에는 공작의 분포, 생김새, 습성, 소리, 성별, 포획 방법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공작의 화려한 깃털은 공작 부채 같은 공예품으로 제작됐다. 당나라 때는 규정에 따라 황제의 조회(朝會)에 150여 개에 달하는 공작 부채를 장식해 황실의 위엄을 과시했다. 불교문화가 전파되면서 불모 공작 명왕(佛母孔雀明王) 전설이 공작에 종교의 상징성을 부여했고 상서롭다는 문화적 함의가 더해졌다.


반면, 중국 남서부 변방에 사는 사람들은 공작이 흔했기 때문에 공작이 희귀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공작 고기를 먹기도 했다. 원(元)나라의 건강서 <음식수지(飲食須知)>에는 공작 고기의 특징과 함께 ‘약한 독성’이 함유돼 있으니 해독제와 함께 먹어야 한다고 강조한 기록이 있다.


청(清)나라 때는 관료의 모자를 공작 깃털로 장식하고 ‘화령(花翎)’이라고 했다. 공작 깃털에 있는 색색의 둥근 반점이 많은 ‘화령’일수록 관리의 등급이 높음을 나타냈다.


고대 한국의 공작

공작이 언제 조선반도(한반도)에 전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6~8세기 무렵 중국으로부터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 중엽, 신라의 문성왕과 헌안왕이 안장된 곳의 이름이 ‘공작지(孔雀趾)’인 것으로 보아 당시 신라인이 공작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덕왕 때 진골 여성과 오두품 여성의 의상 장식에서도 공작 꼬리가 나타난 것으로 봤을 때 신라인은 공작 깃털을 화려함과 부귀의 상징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두 나라 무역 교류도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신라에서는 공작이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는 해상 무역을 통해 일본에 공작을 여러 차례 선물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이 축하 사신을 파견해 공작 부채를 선물했다. 1157년 송(宋)나라 상인은 고려 왕에게 공작을 진봉했다. 1163년 송나라 사신 서덕영은 선물로 공작을 가져왔고, 1292년에는 상인 서흥조가 공작을 바쳤다. 공작이 국가 정사에 기록될 정도면 고대 한국인이 공작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원나라 말기 중국의 지방 군벌 장사성도 사신을 통해 고려에 공작을 보냈고 이를 받은 공민왕은 매우 기뻐하며 공작을 신하에게 하사했다. 고려 때는 국가의 예법에 당송의 특징을 받아들여 조회나 왕이 순행할 때도 작선(雀扇, 공작 부채)과 공작 일산(日傘)을 설치해 왕의 권위를 드러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동남아 화교 상인 진언상이 조선으로 운반하던 화물이 전라도 군산 외해에서 왜구에 약탈 당했다. 빼앗긴 화물 중에는 공작도 포함돼 있었다. 대마도(對馬島) 주인의 수중에 넘어갔다가 다시 조선 태종에게 진상됐고 태종은 공작을 상림원에서 키우도록 했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받아들여 작선과 공작 일산을 사용했다. 이 가운데 연화작선은 연꽃 문양에 색을 칠해 화려함을 더했다. 세손빈이 탔던 연여의 향낭에는 금색 공작 문양이 장식돼 있었는데 이는 예법 상 왕비와 세자빈의 금빛 봉황 문양 다음가는 것 이었다. 1454년 조선은 <황명예제(皇明禮制)>의 문무 관료 관복 앞뒤 문양 규정에 따라 1품 문관의 문양을 공작으로 했다. <경국대전주해>에는 공작 깃털 채취 방법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공작, 부귀인가 사치인가?

고려의 유득공은 ‘목단과 공작이 다 시들었다(牧丹孔雀凋零盡)’라는 표현을 통해 신라의 고도 경주의 번영이 사라졌음을 묘사했다. 고려의 재상 차약송은 공작을 키우는 방법을 알았지만 본업에 충실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벗과 함께 귀족 집을 방문한 이규보는 그 집에 공작이 있는 것을 보고 공작을 주제로 시를 지으며 부귀의 풍조를 잘 나타냈다.


고려 시대 귀족 가문에서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공작 문양을 수놓은 병풍을 즐겨 사용했다. 서거정은 <홍매목단공작도(紅梅牡丹孔雀圖)>, <홍매공작소작도(紅梅孔雀小雀圖)>라는 시에서 공작에 담긴 부귀 문화를 드러냈다. 김인후와 강준흠은 왕비(중궁전)의 복을 기원하는 시에서 공작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공작을 길조의 새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이명오는 손녀의 약혼식을 위해 귀족 집안에서 공작 병풍을 빌려와 약혼 연회에 풍요로움과 화려함을 더했다. 김택영도 공작이 나는 새 중 가장 뛰어나고 귀한 새라고 했다.


그러나 공작의 생장 환경은 조선의 풍토나 기후와 맞지 않아 공작 사육은 귀족의 유희를 위한 것에 그쳤다. 국가와 민생에도 큰 이익이 없었기 때문에 사대부와 유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선조 시기 대마도에서 공작 한 쌍을 선물하자 조정 대신들은 이것은 감상품에 불과하고 조선의 풍토는 공작 사육에 적합하지 않아 필요 없다고 했으나 선조는 외교 관계를 고려해 어쩔 수 없이 공작을 받아들여 남쪽 섬에서 기르도록 했다.


광해군 시기의 관료 박엽은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명(明)나라와 교역을 통해 진귀한 물건을 많이 소장했다. 그가 공작 깃털로 짠 비단과 옷을 광해군에게 진상하자 광해군은 이를 매우 아꼈다. 이러한 이유로 박엽은 후세에 간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제 공작은 중한 양국에서 더 이상 희귀한 새가 아니다. 동물원에서 언제든 가까이 마주하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적 상징성만큼은 변함없어 두 나라에서 여전히 공작은 부귀와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통한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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